11. 기독교는 왜 십자가를 강조하는가?11. 기독교는 왜 십자가를 강조하는가?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떤 분들에게는 십자가가 불편한 상징입니다. 고통, 피, 저주, 죽음… 이 단어만 들어도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듯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십자가는 가장 혐오스러운 형벌의 도구였습니다. 로마 시민은 그 형벌을 언급조차 꺼려했고, 유대인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누군가는 ‘십자가’라는 말을 듣고 귀를 씻는 시늉을 할 정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바로 그 십자가를 복음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사람들의 거부 반응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는 십자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오해하고 꺼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징이라고 느낍니다. 인간의 고통을 중심에 두는 기독교가 무겁고 피비린내 나는 종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부적처럼 소비하거나, 종교적 액세서리로만 생각합니다. 이런 오해들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십자가를 붙듭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전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조금 나아졌을 때, 회개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던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 감정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그것은 확증된 사랑이며, 피 흘림으로 새겨진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깊은 죄에 빠졌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그 죄인을 품으셨는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사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대신 계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예전에 한 찬양사역자(소향)가 수천 명이 모인 예배 집회에 섰을 때의 일입니다. 무대 스크린이 그를 비추며 예배당 정면에 있던 십자가를 가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요청했다고 합니다. “스크린을 내려주세요. 제가 아니라, 십자가가 보여야 합니다.” 그 고백은 찬양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축복을 끌어오는 도구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차에 걸고, 목에 걸고, 귀신을 쫓는 부적처럼 다룹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도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거기엔 한 분의 피 흘리심과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한 대속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게 복을 주는 물건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복을 내려놓으신 분의 흔적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개인의 구원을 말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세상의 복수와 미움의 고리를 끊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세상은 보통 악에 맞서 또 다른 악으로 대응합니다. 힘에는 더 큰 힘으로, 억압에는 더 강한 저항으로 응수하려 합니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어 왔습니다. 억눌린 자가 권력을 쥐면 또다시 누군가를 억누르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복수의 고리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고리를 십자가에서 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한 재판을 받고, 군인들에게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한마디는 모든 복수의 고리를 끊는 하늘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찾아가신 대상은 로마 병사들도, 빌라도도, 대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 숨어 있던 제자들, 그분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이들, 심지어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꾸짖기보다 다시 부르시고, 다시 맡기시고, 다시 안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억울함 앞에서 보복하지 않고, 상처 앞에서 미움으로 갚지 않으며, 악을 품고도 선을 선택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를 새롭게 쓰는 길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미움의 순환을 끊고, 전혀 다른 질서를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정의는 ‘되갚음’ 위에 세워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대신 감당하심’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소유’하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교회 벽에 걸어두는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감당하며 살아내야 할 사랑의 무게입니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감당하셨는지,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불편하게 여깁니다. 고통과 피, 죽음을 떠올리면 어둡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독교가 십자가를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원래 혐오스러운 사형틀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고, 로마인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서셨고, 그분은 보복이나 정죄 대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세상의 복수의 고리를 끊는 새로운 선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나 부적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복을 내려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단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되갚음’으로 정의를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대신 감당하심’으로 정의를 이루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