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기독교는 왜 회개를 강조하는가?12장. 기독교는 왜 회개를 강조하는가?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기독교는 늘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복음서에서도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예수님 역시 사역을 시작하며 똑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주님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회개만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만나실 때마다 “회개하라”고 외치셨다면, 복음은 율법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먼저 ‘회개한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로 만나주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고백이지만, 그 순서는 언제나 은혜가 먼저이고 회개는 그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많은 이들이 회개를 구원의 전제조건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억지로 짜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진짜로 만났을 때, 인간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눈물과 함께 무릎 꿇게 됩니다.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자격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신자의 첫 고백입니다. 은혜는 언제나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감사’입니다. 내가 기대한 만큼의 은혜를 받았거나,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았다면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은혜가 내 예상보다 더 크고 따뜻하면 우리는 감동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내가 감히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사람은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회개는 그 다음에 찾아옵니다. 어느 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친구가 내게 돈을 보내줍니다. “이자 갚는 데 보태라”고 말하면서. 그때 나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며칠 뒤, “너 힘들겠지? 생활비도 좀 보탰어”라며 추가로 돈을 보내주면, 그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친구가 내 모든 빚을 한 번에 갚아주었다면, 나는 그 은혜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위해 작은 가게까지 차려주며, “앞으로는 다시는 빚지지 말고 여기서 새롭게 시작해”라고 말해줍니다. 그 순간 나는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 펑펑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눈물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의 무게보다, 은혜의 무게가 더 클 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주할 때,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됩니다. 회개는 억지로 짜내는 감정이 아니라, 은혜가 너무 커서 내 죄를 외면할 수 없는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회개’라는 단어는 점점 낯설고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실수라고는 말해도 죄라고 말하길 꺼립니다. 반성은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말이 곧잘 ‘자기 비난’이나 ‘수치심’으로 오해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면 ‘나는 나쁜 사람이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감정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 자기혐오이지,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여전히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회개를 초대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용서를 믿게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만삭되지 못한 자”라고 자신을 표현했지만, 사역 말기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더 깊은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감정적으로 스스로를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고운 가루 제물처럼 부드럽고 정결한 마음이 필요하지만, 그 마음조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약의 속죄제처럼, 하나님은 ‘얼마나 정결한가’보다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릴 회개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죄를 이기려는 결의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정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은혜를 믿고 다시 붙드는 그 마음입니다. 삭개오가 주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나누겠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참된 회개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격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죄를 숨길 수 없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회개를 외치되, 그것을 은혜로 부드럽게 감쌉니다. 죄책감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깊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은혜는 값싼 위로로 흘러가고, 은혜 없는 회개는 율법적 자기학대로 변질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죄책감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죄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 앞에 감사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자책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주님은 회개가 느린 우리조차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정죄가 아닌 회복을 위해, 책망이 아닌 초청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회개를 무거운 의무로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이고, 내가 그 사랑 안에 살아 있다는 확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를 기억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며, 용서받을 수 없는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앞에서 울며 웃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다시 입는 기쁨의 자리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부담스럽게 느끼십니다. 마치 기독교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회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자책이나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반응입니다. 예수님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다’(눅 5:3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만날 때, 사람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회개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그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용서와 회복의 은혜가 내 삶에 자리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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