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나님의 뜻은 왜 때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가?15. 하나님의 뜻은 왜 때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가?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완전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 뜻을 따라 산다는 건 믿는 이들의 마땅한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길을 걸어보면,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고 외롭고 고단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묻게 됩니다. “정말 이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맞나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 어떤 선택은 희생만 남고, 어떤 길은 십자가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길을 걸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마음속 깊은 욕망부터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더 테레사의 삶을 존경합니다. 인도 빈민가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사랑을 실천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의 전형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97년 마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같은 해에 또 다른 인물인 다이애나 비 영국 왕세자비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한 신문사에서 대중을 상대로 이런 설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묻습니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마더 테레사를 꼽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으로는 다이애나 비를 선택했습니다. 헌신과 섬김의 삶은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현실에서 살고 싶은 삶은 화려하고 주목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갈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편안하고 싶습니다. 마음은 정직하게 살고 싶지만 손해 보는 게 두렵고, 법을 지키자니 뒤처질 것 같고, 법을 어기자니 신앙 양심이 걸립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 살면 바보 취급합니다. “시험장에서 다들 답을 주고받는데 나만 혼자 문제를 푸니까, 오히려 왕따가 됐어요. 정직하게 굴다 손해봤다는 소리만 듣게 되더라고요.” “뒷돈을 거절했더니 상사 눈밖에 났어요. ‘혼자 깨끗한 척하냐’는 비아냥을 듣고 중요한 프로젝트에서도 제외됐죠.” 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새로 이사 온 난민 가정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하게 인사하고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심은 “괜히 티낸다”, “분위기 흐린다”는 냉소로 돌아왔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선한 행동은 오히려 불편한 거울이 되고, ‘믿음 좋은 척 한다’는 말로 돌려받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아이에게 신앙을 지키는 삶을 가르치고 싶은데, 주일에 학원 안 보내면 성적이 밀릴까 봐 불안해요. 수련회는 방학특강이랑 겹치면 보내기 어렵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내가 너무 나약한 것 같고… 그래도 신앙도 지키고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너무 어렵네요.” 그 마음속엔 두려움과 바람, 양심과 현실이 뒤섞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좀 유연해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믿음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민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이 길이 정말 옳은 걸까?” “나만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닐까?” 이 고통의 본질은 단순히 ‘외부의 시선’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은혜를 입어 새 마음은 주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옛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편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부딪칩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회복된 내면과 연약한 육신 사이에서, 갈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곧 우리가 죄에 무감각하지 않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뜻을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런 갈등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밭길로 향했고,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로 눈물과 오해, 침묵과 손해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도 처음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은 희미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주님이 그때도 함께 계셨구나. 그 길로 나를 이끄셨구나.” 그러나 이 모든 성경 이야기들은 단지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었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속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순간에도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켜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억지로 참아내는 고난의 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진짜 나답게’ 되어가는 길입니다. 더 이상 옛사람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기에, 새사람답게 살아가는 연습이자 회복입니다. 지금은 불편하고 낯설어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는 이 길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우리를 가장 자유롭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이런 고민과 갈등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이들이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청년, 직장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약속을 붙들며, 우리는 함께 그 뜻을 따라 걷는 순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합니다. 우리의 걸음은 여전히 느리고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방향’을 보십니다. 그 뜻을 향해 오늘도 한발자국 내딛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순종이며, 결국 그것이 우리를 가장 나답게 살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예수를 닮아가도록, 결국 부활의 생명에 이르게 하시려는 사랑의 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힘들다고 느낍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양가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존경받는 마더 테레사의 삶을 이상적으로 여기지만, 정작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은 다이애나 비 같은 화려한 삶일 때가 많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지만, 동시에 편안함과 인정도 갈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때로는 십자가처럼 무겁고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성경도 이런 갈등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눈물과 오해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은 ‘고통이 사라진다’는 보장이 아니라, 고통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결국 선으로 바뀐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억지로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진짜 나답게’, 새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다듬으시는 과정입니다. 지금은 낯설고 힘들어도,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이 길이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분이십니다(빌 1:6). 고통스러워 보이는 길도 결국 우리를 예수님 닮은 자리, 부활의 생명으로 이끄는 사랑의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