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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나는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17장. 나는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전재훈 | 입력 : 2026/04/1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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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는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솔직히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아직 사과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분명히 저질렀는데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 정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피해자에게 용서하라는 말은 마치 자신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라는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정의를 포기하라는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수십 년 동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도(백인 소수 정권이 흑인 등 유색 인종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분리·차별한 제도)로 인해 극심한 인종차별과 인권 유린을 겪었습니다. 흑인과 유색인들은 거주지와 교육, 이동, 정치 참여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수많은 폭력과 고문, 불법 구금, 심지어 살해가 자행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붕괴되고 민주주의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사회는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세워진 것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였습니다. 위원회는 피해자들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증언할 기회를 주었고, 가해자들에게는 자신의 범죄를 숨김없이 고백하면 법적 처벌 대신 면제(amnesty)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범죄임을 인정하고, 그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회 전체가 과거의 진실을 직면할 수 있었고, 무력 충돌이나 보복 대신 공동체 회복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상실감을 안게 되었습니다. 가해자 상당수가 실제 처벌을 피했고, 국가 차원의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RC는 분명 화해와 평화를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정의 없는 용서가 진정한 화해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의와 용서를 따로 떼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선포된 자리였습니다. 정의와 용서는 서로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함께 완성된 것입니다.

 

세상도 용서를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용서의 초점은 대개 나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용서를 주로 감정의 해방으로 설명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은 결국 나를 묶어두고 병들게 하기 때문에,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요. 대중문화 속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자주 접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장면은, 사실 상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가 더 이상 그 상처에 묶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래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용서하라, 그래야 네가 자유로울 수 있다입니다.

 

물론 이런 접근도 일리가 있습니다. 미움과 원한에 매여 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결국 나 자신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용서는 조금 다릅니다. 복음 안에서의 용서는 단순히 나를 위한 감정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반응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용서가 자기 해방을 위한 선택이라면, 복음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당신의 아들에게 전가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여전히 용서하지 못할까요? 상처가 너무 깊어서 아직 피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용서가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믿고 싶지만,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미워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입술로는 찬양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원망했던 그 감정이 사람을 향한 용서까지 가로막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종이 왕에게 상상할 수 없는 빚을 탕감받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통해 너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는 교훈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아도 여전히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타인을 기꺼이 용서하며 살기 어렵습니다.

 

이 비유의 깊은 핵심은 종이 동료를 용서하지 않아 도로 감옥에 갇혔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의 아들이 종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가 사형을 당하고, 종은 오히려 왕의 아들의 자리로 올려져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실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으로 머무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가 되었고, 그 나라를 상속받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할 뿐 아니라, 동료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억지로 쥐어짜는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과 상속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용서는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새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내가 받은 용서를 진심으로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기억할 때,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반응이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고,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 일을 끝까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용서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지만, 그건 단순히 내 감정을 억누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정의와 용서를 함께 이루셨습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가 치러졌고, 동시에 죄인에게 자비가 주어졌습니다.

세상은 보통 용서하면 네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네가 먼저 용서받았으니 그 은혜 안에서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처가 여전히 아프거나, 상대가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를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 은혜를 깊이 기억할 때, 용서는 억지로 쥐어짜는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에서 흘러나오는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완벽한 감정 정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드셨다는 은혜를 기억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고백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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