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본 문화 단상 2] AI에게 "고통이 뭐냐"고 물었다욥기와 카뮈 사이에서어느 날 밤, 저는 Claude에게 이렇게 입력했습니다.
"고통이 뭘까?"
설교 준비 중이었습니다. 본문은 욥기였고,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며칠째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욥의 고통을 설명하는 주석은 많았습니다. 신정론 논쟁도 읽었고, 고난의 신학도 훑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형광펜이 그어진 책들이 쌓여 있었고, 메모장에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강단에 서는 상상을 하면 말이 막혔습니다.
이론은 있는데, 언어가 없었습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욥기 앞에서 저는 그 차이를 무겁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과, 그것을 고통 앞에 선 사람에게 건넬 수 있다는 확신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물어봤습니다. 아이에게 설명하듯 쉽게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Claude의 답은 나름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을 신체적 고통과 실존적 고통으로 나누고, 철학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을 함께 정리해 주었습니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습니다. 맞는 말인데, 차가웠습니다. 고통을 설명하는 문장인데, 고통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고통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고통에 관한 백과사전을 꼼꼼히 읽고 써준 글 같았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허전했습니다.
저는 화면을 닫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오래전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이 떠올랐습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방아쇠를 당기고, 재판정에서도 담담합니다. 세상은 그를 괴물로 봅니다. 무감각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카뮈가 그 소설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냉혹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이유를 찾아도, 우주는 침묵으로 답한다. 카뮈는 그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려 했습니다. 뫼르소의 무표정은 냉담함이 아니라, 설명 불가능한 세계 앞에 선 인간의 정직한 초상이었습니다.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다.
카뮈는 그것을 논문이 아니라 소설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개념이 아니라 장면으로, 정의가 아니라 인물로.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은 수십 년이 지나도 독자를 흔들어 놓습니다.
욥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욥기를 읽다 보면,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사람은 먼 길을 달려와 욥 곁에 앉았습니다. 처음 칠 일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고통이 너무 커 말로 위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침묵만큼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욥이 입을 열자, 친구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틀린 말이 없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나름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설명들을 하나씩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설명 가능한 것으로 축소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 오히려 더 깊은 모욕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욥이 원했던 것은 해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욥 23:8)
이 한 구절에 욥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신학적 회의 같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의 절박함입니다.
그날 밤 Claude는 욥의 친구들처럼 말했습니다.
정확하게, 정돈되게, 빠짐없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이 욥의 고통 앞에 놓이는 순간, 무언가 어긋났습니다. 언어가 정확할수록, 오히려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역설. 욥의 친구들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은 것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밤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7)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틀렸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저는 AI에게 고통을 묻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고통이 뭘까?" 라고 묻는 대신, "이 사람은 왜 하나님께 따지는가" 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개념을 묻는 대신, 장면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화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AI도 개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붙들고 같이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몇 장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친구들의 논리가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하나님의 침묵이 욥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서술되는지를 같이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도구는 질문의 수준을 따라옵니다.
막연한 질문에는 막연한 답이 나오고, 구체적인 장면을 붙들고 물으면 훨씬 구체적인 대화가 됩니다.
그것은 AI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도와 대화할 때도, 설교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고통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지금 이 사람의 고통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저는 또 하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통 앞에 선 성도에게 우리가 건네는 말이 설명이 아니라 동행이어야 하듯이, AI와의 대화도 정답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텍스트 앞에 머무는 자리일 때 비로소 쓸 만해집니다.
설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날 밤 AI 앞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의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입니다. 전자는 AI가 저보다 훨씬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지금으로서는 AI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차이가 오히려 저를 안도하게 했습니다.
대체되지 않는 자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말씀하셨지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고통을 허락했는지, 사탄과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욥이 시험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욥은 그 이후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이 고백이 욥기의 가장 깊은 자리입니다. 설명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현존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쩌면 목회자가 AI를 사용하면서 가장 분명하게 배울 수 있는 역설이 거기 있는지도 모릅니다.
AI가 설명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넓어질수록, AI가 설명할 수 없는 자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통 앞에서 묵묵히 곁에 있는 것, 폭풍이 지나간 후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 아무 말 없이 손을 잡는 것,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것은 어떤 AI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설명이 아니라 현존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현존의 자리가, 지금도 목회자의 자리이자 성도의 자리입니다.
저는 요즘도 설교 준비를 할 때 AI와 대화합니다. 그런데 예전과 한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제 AI에게 답을 묻지 않습니다. 대신 같이 읽어달라고 합니다. 같이 따라가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AI가 멈추는 자리, 설명이 끊기는 자리, 논리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저는 오히려 더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가 설교의 심장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필자소개 ]
손하람 목사 (분당한신교회 부목사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Th.D. 과정)
"기술을 넘어, 다시 사람과 하나님 앞에 서는 목회의 길을 묻습니다."
손하람 목사 : 디지털 명함 바로가기 AI와 함께하는 더 깊은 목회 홈페이지 : www.haram.a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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